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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행·일상

도봉(道峯)

by 경무(景武) 2023. 3. 17.

 

 

산새도 날아와
우짖지 않고,

구름도 떠가곤
오지 않는다.

인적 끊인 곳,
홀로 앉은

가을 산의 어스름,
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

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,
울림은 헛되이

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,
산그늘 길게 늘이며

붉게 해는 넘어가고,
황혼과 함께

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,
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,

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.
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

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,
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
어느 마을에서 쉬느뇨.


도봉(道峯) - 박두진



청록파의 한 분이었던 박두진 선생이 쓴 10연의 시인데, 지면이 모자라 행을 붙여 배열했다. ’도봉’을 처음 읽었을 때 내 관심을 끈 것은 자연 묘사가 두드러지는 앞이 아니라, 생의 쓸쓸함을 토로하는 뒤의 3연이었다. “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”에 감전된 나는 시인이 노년에, 오십대가 지나 쓴 시라고 예단했다. 생의 쓸쓸함을 이렇게 짧고 굵게 관통하려면 나이가 들 만큼 들어야 하지 않나.


작품 연대를 확인해보고 나는 놀랐다. 1944년, 해방 직전에 30세도 안 된 시인이 쓴 시라니. 식민지 청년들은 일찍 늙었나. 일제강점기를 의식하고 시를 다시 읽으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된다. ‘산새도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’ 이상한 산에 갇힌 청년, 그 답답한 침묵과 공허가 가엽다. 마지막 행에 나오는 ‘그대’만이 그를 구원하리라. [최영미 시인·이미출판 대표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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